어둠
아래의 시는 대학교 2학년 재학시절 김혜순 교수님 수업 때 우수작으로 선정됐던 시입니다. 조건: 어둠을 화자로 a-b구도 시 쓰기
- 어둠
나는 면과 면이 만나는 모서리에 웅크리고 있다
지하실 문을 열면 나는 사방으로 흩뿌려지고
먼지가 쌓인 곳엔 나의 발자국뿐이다
기도하는 사람이 두 손을 포개면
나는 손금에 스며들어 더 깊이 숨어들어간다
잎사귀가 만나야 들리는 바람의 소리같은 사람이어서
나에게 대한 목격담은 드물고
혼자 있는 방에선 자꾸 내 몸이 면으로 물들어간다
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와도 나는 정말 사라진 게 아니라서
형광등 속의 벌레들을 기리며
빛의 관 속으로 걸어들어간다
나는 불이 켜지면 내 앞의 의자가 되어보기도 하고
도망쳐버리고 싶은 날엔 골목에 주저앉아 울기도 한다
그럴 때면 말아 쥔 주먹 속에 웅크리고 있는 아이가
꼭 내 얼굴으 하고 있다
계단에서 미끄러진 발을 낚아채고
나무가 되어 몰래 걸어보아도
나는 오지도 않을 이들을 기다리는 게 익숙해서
쪼그려 앉는 게 익숙해졌다
창문을 열면 진짜 나는 바깥으로 흩날리고
나를 닮은 내가 방이 되어 나타난다